01. 쇼코의 미소.e - 최은영

표제로 쓰인 쇼코의 미소를 비롯해 일곱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처음 접하는 작가고 제목도 끌리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좋다는 평이 많아서 궁금해서 읽어봤다. 각 단편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으로 절대 가볍지 않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일곱 편의 이야기 중에서 네 번째로 나오는 <한지와 영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만큼 가깝고도 먼 것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화자인 영주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이야기 속에서 얼핏 스쳐 지나가는 한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내겐 불가능했다. 그래서 지금도 한지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 아이러니. 글이 나쁘진 않았지만,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김연수 작가 글도 정말 안 맞는 편인데 그 김연수 작가가 추천한 신인 작가였다니!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이런 유의 글은 나와 맞지 않는다.


02. 안개속의 소녀.e - 도나토 카리시
알프스 산골 마을에 살던 소녀 '애나 루'가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사라진다. 과거 증거조작으로 무고한 사람을 연쇄살인범으로 몰고 갔던 수사관 포겔이 '애나 루 실종사건'을 맡게 된다. 포겔은 이 사건을 이용해 화려한 재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미디어와 대중 그리고 성공에 눈이 먼 인간의 조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도나토 카리시는 '속삭이는 자'를 읽고 반해서 이후의 작품은 모두 찾아 읽고 있는데 첫 작품만큼 확 빠져들 게 되는 건 아직 없다. 하지만 작품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해서 매력 있는 작가다.


03. 이슬람 정육점.e - 손홍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한국에 눌러살게 된 터키인 '하산'은 보육원에서 아이를 입양한다. 그 아이가 이 소설의 화자를 맡은 '나'이다. 하산은 독실한 이슬람교인이지만 먹고 살기 위해 돼지고기를 파는 정육점을 운영한다. 하지만 장사는 신통치 않다. 야모스 아저씨, 충남식당의 안나 아주머니, 유정, 맹랑한 녀석까지 인종도 사연도 다른 그들이 서로 상처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글은 괜찮았는데 내내 우울한 분위기가 싫었다. 날이 갈수록 한국문학의 우울함을 견디기 힘들어진다.


04. 신이 없는 달 - 미야베 미유키
예약이 뜨면 바로 사는 미미여사의 에도 시대물.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오싹하고 정겹고 때론 슬프고 잔인한 이야기를 묶은 단편집인데 읽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좋아한다. 지금까지 18권인가가 출간됐는데 표지도 예뻐서 모아 놓고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이번 단편집은 한 달에 이야기 하나씩, 모두 12가지의 이야기가 모여 1년이 된다. 권수가 많아지니 매번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인 듯도 하지만 지금까지는 질리지 않고 잘 읽어왔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94년도에 쓰인 글이던데 다음엔 신작으로 만나면 더 좋을 것 같다. '외딴집' 같은 장편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05. 꿀벌과 천둥 - 온다 리쿠
이 얼마 만에 읽는 온다 리쿠의 소설이던가! <밤의 피크닉> 읽고 좋아서 내리 열 몇 권을 읽고 질렸던 작가인데 '피아노 콩쿠르'란 소재가 마음에 들어서 신작을 샀다. 책을 받고 보니 두툼한 두께에 겉 커버를 벗기면 꿀벌이 떠오르는 예쁜 노란색이 나와서 마음에 들었다. 이건 밤의 피크닉때부터 느낀 건데 온다 리쿠의 글은 자극적인 사건이나 특별한 무언가가 없는데도 막힘없이 술술 읽힌다. 미미여사는 '모방범'이나 '솔로몬의 위증' 같은 장편일 경우 종종 이야기가 장황해져서 지루해질 때가 있는 데 온다 리쿠는 그게 없다. 매우 큰 장점이다. 소설의 제목에서도 유추 가능하듯 양봉가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 떠돌며 자유롭게 음악을 해 온 '가자마 진'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작가는 가자마 진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콩쿠르에 참가하는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골고루 이야기를 만들어준다. 그 결과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인물이 모여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클래식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더 재밌게 읽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지만 온다 리쿠가 글로 써 내려간 음악을 상상하며 듣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06. 안녕 주정뱅이.e - 권여선
각 단편마다 술에 취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읽다 보면 나까지 취하는 기분이었고 덤으로 우울하기까지 해서 별로였다.


07. 보건교사 안은영 - 정세랑
한국 문학 특유의 우울함, 노란 장판 감성 따윈 전혀 없이 재기발랄하며 내내 유쾌하다. 사실 '귀신 보는 교사'라는 설정만 놓고 보면 심각하고 우울할 것 같은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밝고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귀신 보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M고에 부임하여 보건교사 일과 더불어 퇴마사 일까지 묵묵히 해나간다. M고 설립자 후손인 한문 교사 홍인표는 그가 가진 거대한 에너지로 보건교사 안은영의 조력자가 되어준다. 학교가 무대이기 때문에 학생들과 얽힌 이야기가 재밌고, 안은영과 홍인표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읽어나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짤막한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형식이라 읽기도 편하다. 유쾌하고 사랑스럽고 재밌는 소설이 읽고 싶다면 제발 이 책을 읽어주세요.


08. 카오스 워킹 1,2,3 - 페트릭 네스
매즈가 현재 촬영 중이라는 동명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남자들만 사는 프렌티스 타운은 과거 원주민 스팩클이 '노이즈' 세균을 퍼트려 여자들은 몰살됐고, 살아남은 남자들은 스팩클을 멸종시켰다. 살아남는 남자들은 노이즈 세균에 전염되어 서로의 생각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생각까지 들을 수 있다. 프렌티스 타운의 유일한 소년인 '토드'와 우주에서 정착지를 찾아 떠나온 '비올라'가 선의 역할을 한다면, 그 반대편엔 '프렌티스 시장'이 있다. 1권이 두 권으로 나뉘어 있어서 총 4권인데 소재도 독특하고 전개도 빨라서 매우 재밌게 읽었다. 각종 차별을 비롯해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고, 점점 성장해가는 토드와 비올라를 지켜볼 수 있는 성장 소설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가장 기대되는 건 역시 프렌티스 시장과 토드의 긴장감 넘치는 관계성이다. 매즈는 이번에도 악역이지만 항상 단정한 제복을 입고 비누 냄새를 풍기는 프렌티스 시장은 조금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