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라마와의 랑데부 / 아서 C. 클라크 / 아작

서기 2130년 지구촌을 넘어 우주촌이 된 시대, 길이 50km의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소행성인 줄 알았던 물체의 진짜 정체는 외계인이 만든 원통형의 인공구조물이었다. 인류는 원통 우주선에 '라마'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내부를 탐사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우주선을 파견한다. 이야기 구조는 라마 발견 -> 라마 내부 탐색 -> 라마와 이별 순으로 단순하다. 이 소설이 특별한 건 외계 우주선 라마를 그려내는 상상력에 있다. 글을 길잡이 삼아 라마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새로운 놀이기구를 타는 것만큼이나 신나고 즐거웠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안겨줬던 소설. 2018년 첫 책이었는데 신선하고 재밌어서 기분 좋았다.


02. 테두리 없는 거울 / 츠지무라 미즈키 / 아르테
일본 학교마다 하나씩은 존재한다는 계단의 하나코 괴담을 비롯하여 다섯 편의 괴담 실린 소설집이다. 일본은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추리 소설이지만 밝고 대중적인 글을 쓰는 작가가 있는 반면, 일본 특유의 음습하고 기괴한 느낌이 드는 글을 쓰는 작가가 있다. 이 작가님은 후자에 가깝다. 일본 20~30대 여성이 사랑하는 작가라는데 나는 별로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히가시노 게이고가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건 음습하고 기괴한 느낌이 덜해서 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03.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 최재천 / 효형출판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가 쓴 동물과 인간 이야기다. 개미, 꿀벌, 박쥐, 뻐꾸기, 고래 등 여러 동물의 생태를 살피고 곁들여 우리네 인생에 대해서도 돌아본다. 모든 생명은 자신들만의 세계가 있다. 그들은 종족 번식을 위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천적을 상대하는 방법과 먹이를 구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은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며, 그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거나 다른 동식물의 생존에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오직,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만이 불필요하게 환경을 헤치고 생명을 짓밟는다. 동식물만 살아가는 자연에선 약육강식의 법칙이 당연하지만 21세기 지구에선 인간과 동물, 식물이 모두 더불어 살아야 한다. 작은 꿀벌들이 지구에서 사라지면 언젠가 인간들 또한 사라진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고,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 인간부터 변화한다면 그 연결의 끈이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04. 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 자음과모음
일곱 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으로 하나같이 독특한 면면을 보여준다. 그로테스크(grotesque)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가장 와닿았던 단편은 표제로 쓰인 '고의는 아니지만'이었다. 15명의 아이를 차별 없이 챙기려고 노력하는 유치원 교사의 이야긴데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저마다 다른 불평, 불만뿐이다. 우리 사는 세계에선 고의가 아니었던 말 때문에 누군가는 상처받고 가끔은 누군가 목숨을 잃는다. 고의가 아니었다 해도 들어서 기분 나쁘다면 그건 고의가 아닐까. 좀 더 말조심하며 살아야겠다. 구병모 작가는 위저드 베이커리로 처음 알게 되어 이후 출간되는 작품은 거의 다 찾아 읽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작가의 문장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분명히 인지한 건 '파과'때였는데 그때부터였을까? 문장이 길어지면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독서의 흐름이 깨진다. 파과에선 한 문장이 한 면을 다 채우는 경우고 있었고, 이 책에선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시나 긴 문장이 많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일지라도 가독성이 떨어진다면 읽고 싶지 않다. 앞으로 작가의 글을 멀리할듯한 예감이 든다.


05.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문학동네 / E.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전쟁터에 남성이 아닌 여성도 있을 거란 생각을 단 한 번도 안 해봤다는 사실에 놀랐다. 전쟁 = 남성이라는 선입견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엔 남성도 있지만, 여성도 있었다. 그들은 남성과 똑같이 총도 쏘고 탱크도 몰고 비행기도 조종한다. 그들이 못 할 것은 없으며 그들이 남성과 다른 것은 의미 없는 성별뿐이다. 시대가 그랬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전쟁터에서도 유리천장은 존재했다. 그 유리천장을 깨부수는 여성의 모습이 나올 때마다 끔찍한 전쟁 이야기임에도 통쾌함을 느꼈다. 여러 참전자의 인터뷰가 대화체로 이어지고 중간중간 저자의 글이 나오고의 반복인데 전체적으로 어수선했고 잘 다듬어진 글은 아니었다. 습관처럼 나오는 말 줄임표도 거슬렸고 설명문이 많아서 읽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뛰어난 문체나 구성이 아닌 전쟁에 참전한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있기에 읽어 볼 가치는 충분하다.


06. 아몬드 / 손원평 / 창비 / E.
소설의 주인공은 머릿속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가 유독 작아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소년 윤재다. 설정을 읽자마자 드라마 비숲의 시목이가 떠올랐다. 주인공과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대상을 영상으로 먼저 봐서 그런지 소설 속 윤재의 모습도 쉽게 그릴 수 있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성장해가는 이야기는 어딘가 영화 같았다. 특히, 윤재와 곤이의 관계성에서 영화의 극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다. 본문 전체에 배치된 극단적이고 작위적인 설정은 소설보다는 영화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작가님 이력을 보니 영화 시나리오로 상을 여러 번 받으신 분이셨다. 어쩐지 소설보단 영화 같더라니! 우울함이 싫어서 영화화된다고 해도 보진 않을 것 같지만 영화로 만들기 딱 좋은 소설이다.


07. 다다를 수 없는 나라 /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 문학동네
프랑스에서 포교를 위해 머나먼 베트남으로 떠난 성직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다만, 이 짧은 소설이 극찬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초반 몇 문장을 읽고 나니 간결한 문장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아름다움을 뽐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짧고 건조한 문장 속에 아름다움을 숨기는 건 누구나 할 수 없다. 이 소설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사랑받는 건 아무나 쓸 수 없는 문장에 있는 모양이다. 번역된 문장이 이토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 보니 번역가님의 한국어 실력도 상당하신 것 같다. 김화영 번역가님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아름다운 글을 아름답게 번역해주심에 감사드리고 싶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 건조한 문장을 좋아하는데 이 소설이 그렇다. 본문에 넘쳐나는 여백과 짧은 문장이 남기는 여운이 어우러져 고요하고 서글픈 분위기를 완성한다. 아름다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