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열차 안의 낯선 자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오픈하우스/ E.

건축가 '가이'는 아내 '미리엄'과 이혼하고 새로운 연인 '앤'과 결혼할 계획이다. 가이는 미리엄과 이혼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텍사스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브루노'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살다 보면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개인사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때가 있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란 생각에 상대방에 대한 경계를 낮추는 것이다. 열차 안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하던 중 브루노는 가이에게 교환 살인을 제의 한다. 자신이 미리엄을 죽여줄 테니 가이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일 것을 제의한 것이다. 물론, 가이는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며 제의에 응하지 않고 브루노와 헤어진다. 열차 안에서의 이상한 만남으로 끝날뻔한 브루노와의 만남은 얼마 후 미리엄이 살해당하면서 끈질긴 악연으로 이어진다. 

간단히 말해 사이코패스에게 잘못 걸려 인생 망치는 남자의 이야긴데 지루해서 다 읽는 데 한참 걸렸다. 히치콕이 영화로 만들었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라지만 재미없는 건 재미없는 거다. 읽는 동안 미친 찌질이 브루노한테도 짜증 나고 브루노에게 끌려다니는 가이도 짜증 났다. 다른 사람 죽이는 데 힘쓰지 말고 그냥 서로를 죽이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찌질한 두 남자 때문에 죽은 사람들만 불쌍했다. 피해야 할 작가 목록에 한 분 더 추가해야겠다.    


02. 그 겨울의 일주일 / 메이브 빈치 / 문학동네 / E.
어린 시절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고향 스토니브리지를 떠났던 치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호텔 주인이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대저택을 수리한 소박하고 정감 있는 치키의 스톤하우스 호텔로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진 손님들도 찾아 든다. 글을 읽으면서 이야기 속 아일랜드 사람들의 삶도, 현실 속 나의 삶도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나 말곤 다 잘 먹고 잘사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선택과 후회의 연속 사이에 숨은 작은 행복을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등장인물들의 각양각색 다양한 삶을 접할 수 있어 좋았고 이야기 전체 분위기가 따스해서 좋았다.


03. 킨 / 옥타비아 버틀러 / 비채
1976년 6월 9일 다나의 생일날. 약혼자 케빈과 함께 살기 위해 짐 정리를 하던 중 현기증을 일으킨 다나는 1815년 메릴랜드주의 어느 숲에서 깨어난다. 150년의 세월을 뛰어 넘은 것이다. 숲속에서 호수에 빠진 소년을 구한 다나는 몇 분 후 원래 살던 1976년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시간 여행은 그들을 오랜 시간 고통에 빠트린다. 다나는 처음 시간 여행을 했을 당시 호수에서 목숨을 구해줬던 소년을 몇 번이나 다시 만나게 되면서 시간 여행의 규칙을 알게 된다. 소년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면 과거로 불려오고 자신의 목숨이 위협 받으면 현재로 돌아갈 수 있으며 시간 여행 할 때 다나의 몸에 손을 대면 그 사람 혹은 물건도 함께 시간을 뛰어 넘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타임슬립 소설 같지만 문제는 다나는 흑인이고 약혼자 케빈은 백인이며 그들이 시도 때도 없이 타임슬립하는 시대는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100여 년 전이라는 것이다. 큰 제약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던 현대인이 어느 날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 학대받으며 노예로 산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그 끔찍한 일이 다나에게 벌어진다. 소설 속 다나에게 나를 대입해 읽게 되기 때문에 그가 겪는 인종, 노예, 젠더 차별은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타임슬립이란 소재는 커다란 액자일 뿐이었고 그 안을 메꾸고 있는 건 인간의 추악함과 나약함 그리고 강인함이었다. 


04. 삼귀 / 미야베 미유키 / 북스피어
미야베 월드 2막, 미시마야 시리즈 네 번째 책이다. 미시마야 시리즈 중 단연 으뜸이며, 미야베 월드 2막 전체를 놓고 봐도 베스트 3에 들만한 책이다. 베스트 1은 요지부동 <외딴집>이다.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의 아가씨 오치카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치카의 흑백의 방에선 화자는 말하고 잊고 청자는 듣고 잊는 것이 법칙이다. 흑백의 방에 손님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사람은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번 흑백의 방에선 네 가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죽은 이가 되돌아오는 오두막에서 펼쳐지는 만남과 이별 이야기 '미망의 여관', 도시락집 주인에게 달라붙어 사는 귀여운 먹깨비 요괴 이야기 '식객 히다루가미',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란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 '삼귀', 향료 가게를 지켜주는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아름다운 신 '오쿠라 님' 까지 제각각 매력과 재미가 넘치는 이야기들이다. 네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식객 히다루가미'였다. 굶어 죽어 먹을 것을 밝히게 된 요괴 히다루가미가 착하고 인정 많은 후사고로에게 (게다가 그는 도시락집 창업을 앞두고 있었으니 이런 운명의 데스티니가!) 찰싹 붙어 생활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굉장히 귀여웠다. 

미시마야 시리즈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오치카와 잘 되길 응원했던 습자소 작은 선생 리이치로가 이야기에서 물러나고 흑백의 방 청자도 오치카에서 미시마야 차남 도미지로로 바뀐다고 한다. 여기에 세책 장수 간이치까지 합세한다. 그동안 오치카와 리이치로에게 쌓인 정이 있어서 아쉽기도 하지만 새로운 인물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원작 속편이 이미 4월에 출간됐다고 하니 북스피어의 발 빠른 한국판 출간을 기다려야겠다. 부탁해요! 북스피어!